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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경제이야기/세계의 경제 이야기

성숙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성숙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M.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국가의 당위성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 근대 이후, 국가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지속돼 왔다. 국가가 ‘정의(Justice)’의 직접적 실현 주체라는 견해와 ‘정의’가 구현되도록 간접 지원해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국가의 역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실현 내지는 지원할 ‘정의’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의가 선행돼야 한다. 정의(定義)되지 않은 정의(正義)를 두고 국가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목적지를 모르고 항해하는 배와 같기 때문이다. 국가의 소망성에 대한 논의는,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발전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도약코자 하는 우리나라에 있어 특히 시의성이 있다.

행복ㆍ자유ㆍ미덕 측면에서 바라본 ‘정의’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크게 행복, 자유, 미덕이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눠 파악한다. 먼저 정의를 행복의 측면에서 바라본 견해로 제레미 벤담이 있다. 그는 정의란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옳은 행위란 공리(功利)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그렇기에 국가의 역할은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정책의 편익-총 비용’이 최대가 되도록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 된다.

정의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등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있어 정의란 ‘선택의 자율’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이 자신에 대한 지배를 제한당하지 않을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어야 하며, 치안, 국방 등 최소의 지원만을 수행해 정의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유평등주의자들은 이 의견에 기본적으로는 공감하면서도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이마누엘 칸트는 진정한 자유란 ‘행동의 자율’이 아닌 ‘행동 목적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유 아래 의무를 인식하고 행동해야 옳은 행위라고 본다.

또한 의무는 도덕법에서 도출되는 이성의 산물이라며 자유의 근거를 도덕에서 찾고 있다. 존 롤즈는 칸트의 견해를 사회 전체로 확대시킨다. 진정한 자유 하에서 정의는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이며, 이는 곧 ‘최빈자의 몫이 극대화’되고 ‘차별은 공동에게 이익이 돌아갈 때에만 허용’되는 내용일 것이라고 본다. 즉, 정의란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공정한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국가는 기회 균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유지시킬 뿐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제도로 인한 결과까지 시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미덕(美德)의 추구’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정의란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기에,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이때 ‘자격’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존재의 목적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곧 정의는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경우 국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국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에서 도출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목적이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삶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므로 시민의 미덕이 함양되도록 상호 존중의 바탕 위에 공동체 간의 이견을 잘 조율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세 가지 정의는 모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탐구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으나 각각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먼저 공리주의적 정의는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둠으로써 전체주의 사상에 빠졌던 나치 정권의 예처럼 개인의 권리 경시, 무분별한 가치 단일화로 이어질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정의는 극단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할 경우 배려와 안전장치가 없는 과소국가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데, 산업사회 초기 야경국가의 폐해가 이러한 문제의 한 예이다.

자유평등주의적 관점은 가치의 중립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 분배의 ‘과정’에 있어 국가의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대답이 미흡하다. 즉, 이 견해에 따르면 국가는 공정성의 담보 그 이상의 가치 수행은 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목적론적 정의 개념을 추구함에 따라 목적의 선험적 ‘선(善)’이 지나치게 부각될 경우 정의론 자체가 정합성의 문제로 변질되어 국가가 개인들의 행동에 대해 심판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 특히 한계로 지적된다.

결국 정의는 행복, 자유, 미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개념지을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옳은 행위 즉, 정의는 미덕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와 제도의 공정성을 담보해 사회 전체의 효용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따를 때 국가의 역할 역시 때로는 직접 정의를 실현하는 적극적 주체이면서 때로는 사회 구성원이 정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력자가 될 것이다.

다만 세 가지 측면의 정의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가 처한 상황에 부합하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까지는 사회 전체의 효용을 높이는 것이 국가의 주된 역할이었다. 전쟁 후 피폐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GDP 증가 등의 양적 성장에 치중했다. 그러나 민주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는 오늘날, 보다 중요한 초점은 자유와 공정을 담보하고 미덕을 추구하는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

불공정 사회가 초래한 결과까지 시정하는 노력을

이제 국가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기회의 균등이 실현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보장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불균형,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한 결과를 시정하는 것으로까지 그 역할을 넓혀야 한다. 불합리한 학력 차별을 없애고 시장진입 규제를 정비해 대중소기업 간의 상생을 꾀하는 것이 그 방법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좋은 시민들이 꾸려나가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양극화된 사회를 통합하고 시민 상호 간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국가는, 미덕을 갖춘 사회 구성원 전체가 정치에 참여해 좋은 삶의 본질을 고민하며 실현해 나가는 뉴 거버넌스(New Governance)를 달성할 때 바람직한 역할을 완성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성공적 극복, 세계 7대 수출국 진입 등 세계무대에서 새로운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함께가는 국민, 더 큰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정의’가 실현되는 국가를 만드는 노력이 중요하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국가의 노력은 잘사는 국가를 넘어 성숙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기 때문이다.

배경화 기획재정부 규제개혁법무담당관실 사무관
spiegel@mosf.go.kr

※출처 : 월간 『나라경제』2월호(KDI 경제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