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인근 체육관에서 학교 형과 농구 한 게임을 하고나니 유난히 더운 날씨에 갈증이 몹시 났습니다. 운동을 하려고 나온 터라 지갑도 없고 트레이닝 바지를 뒤적거리다 나온 한 줄기 빛. 꾸깃한 돈 천 원. 게임에서 진 값도 물 겸 가까운 슈퍼로 들어섰습니다.
마침 오랜만에 눈에 들어온 '악어바'. 요즘은 건강 생각한다고 군것질을 안해서 그렇지 한창 먹던 시절에는 입에 달고 살던 놈이라 그 맛이 생각났습니다. 버젓이 붙어있는 “아이스크림 전 품목 30~50% 세일” '악어바'가 비싸봤자 세일도 한다는 데 얼마나 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두 개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또래 쯤 돼 보이는 점원에게 천 원을 곱게 펴서 내려는 찰나 별안간 들리는 한 마디. “천 사백원입니다.”
천 사백원? 수중에 있는 돈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천원. 돈 몇 백원 없어서 아이스크림을 물리기가 너무 창피했습니다. 게다가 동네 아주머니도 아니고 좁은 동네에서 어쩌면 알 법한 내 또래 아가씨. 아이스크림 하나만 계산하고 슈퍼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괜히 민망해서 그 가까운 슈퍼를 피해 편의점을 다니기 시작한 지 몇 일 째. 폭염주의보가 내린 몹시 더운 날이었고 편의점을 들어가 악에 차 '악어바'를 골라들었습니다. 동전 남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동전을 세서 700원을 들고 손을 내미려던 찰나. 이게 왠 걸. '악어바'가 500원인 것입니다. 이 '악어바'가 왜 500원...'악어바'는 분명히 700원...
필자가 직접 오픈 프라이스에 관한 글을 써놓고도 제도의 시행을 까마득히 망각하고 산 지가 벌써 60일이 지났습니다. 소비자의 합리적인 상품구매를 돕고 유통업체 간 가격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제조업체나 수입업체가 아닌 판매자가 직접 상품의 판매가격을 표시하도록 한다는 좋은 취지였지만 시행 이전부터 대형마트의 시장 점유율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되려 영세업자를 죽이고 소비자들에게 가격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는 우려로 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만 500원짜리 '악어바'를 700원에 사먹는 바보가 된 건지... 마침 오픈 프라이스 제도 시행 60일을 맞아 고객들과 판매자들은 얼마나 제도를 이해하고 이용하고 있는지, 정부가 의도한 공정한 가격의 책정이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현장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고객과 판매자들은 얼마나 제도를 잘 이해하고 있는가?
답변자의 최소한의 시간할애를 위해 설문지를 배포, 분석했고 결과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설문은 20대부터 50대까지 총 25명의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편의점, 소규모마트에서 근무하는 점원 및 점주와 상기 유통업체를 이용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설문을 실시한 결과 고객들은 물론이고 가격경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유통업체 근무자, 심지어 점주까지 오픈 프라이스 제도의 시행에 관해 전혀 모르겠다(5명), 들어보기는 했지만 잘 모르겠다(8명)고 답했습니다. 어느 정도 알고 있다(8명)는 응답자도 오픈 프라이스 제도를 유해물질을 확인할 수 있도록 표기하는 제도로 오인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7월1일자로 오픈 프라이스가 확대 시행된 사실은 전체응답자 중 18명이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오픈 프라이스 시행 이후 취지대로 합리적인 가격 안착이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는 시행 이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차이점을 모르겠다(13명)라는 의견이 많았고 오히려 가격이 올랐다(5명)고도 5명의 점원, 점주들이 답했습니다.
설문과정에서 모 편의점의 점주는 이런 제도가 시행될 것이라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금 이 제도가 시행 중이냐?’, ‘정확히 뭐하는 제도냐’, ‘요즘 가격이 다 오르지 않았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응답자들은 한국 소비자원에서 운영 중인 T-PRICE나 스마트폰의 가격비교 어플에 관해서도 처음 듣는다(17명), 들어는 보았으나 이용해 보지 않았다(8명)고 답해 전체 응답자 중 어느 누구도 가격비교를 통한 합리적인 소비를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격경쟁력과 편의성을 모두 상실해가는 영세 마트
‘제품 구매를 위해 가장 많이 찾는 유통업체는 어디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형마트를 주로 이용하는 고객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소규모 마트는 5명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시행초기 우려됐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대형마트, 최근 들어서는 기업형 슈퍼마켓의 영향력이 굉장히 크고 다양한 묶음상품과 세일행사, 체계적인 인프라를 통해 영업을 펼치는 이들에게 영세업자가 대항하기란 어려움이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격은 어떨까요? 직접 구매해 봤습니다.
자금 여건상 양X링, 얼큰한 XXX, 죠X바 등 스낵 1종, 라면 1종, 빙과 1종을 각각 영세 마트, 편의점, 기업형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결과입니다. 아쉽게도 기업형 슈퍼마켓에는 '죠X바'를 팔지 않았습니다.
죠X바를 제외하고 가격을 확인해 보아도 역시 기업형 슈퍼마켓이 가장 저렴했고, 통상 전체 구입가격에서 10%씩 가격할인을 해주던 동네 영세마트인데도 제일 비싸더군요.
오픈 프라이스가 시행되면서 정부에서는 각 매장별로 판매가격을 각각 표기할 것을 권장하였는데, 방문 결과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 편의점은 시행 이전과 마찬가지로 판매가격이 표기돼 있어 가격 비교가 용이했지만 소규모 슈퍼에서는 일일이 상품가격을 표기하는 번거로움과 비용 탓에 전혀 이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응답자들은 오픈 프라이스 시행 이후 가장 불편한 점으로 ‘개별 상품의 가격을 일일이 알고 있기가 어렵다, 가격 표기가 안돼 있어 예상금액을 판단하기 어렵다, 가격 비교가 불편하다, 일일이 비교하고 산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과 편의성을 모두 상실한 영세 마트는 결국 대형마트 위주의 시장 판세에 잠식될 것이 자명합니다. 어느 소비자가 더 비싼 상품을 사겠다고 가격 확인도 어려운 불편을 감내하면서까지 우리 영세마트 살리기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미국과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성공적으로 정착한 오픈프라이스 제도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취지대로 시행되지 않는 제일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복수응답 허용)
설문 결과 가격담합 등 편법을 통한 제도의 악용(11명),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제도의 홍보와 관리(12명), 가격비교를 번거로워 하는 소비자(7명)라고 응답했습니다.
오픈 프라이스 현장 60일, 500원 짜리 상어바를 파는 동네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응답자들 모두가 강조한 바와 같이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오픈 프라이스 제도를 올바르게 알리기 위한 홍보입니다. 가격비교를 생활화 하는 똑똑한 소비자와, 공정한 가격경쟁을 시행하는 유통업자를 기대하기 이전에 ‘이 제도가 어떤 취지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가, 제도를 현명하게 이용하기 위해 소비자들은 어떤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가?’를 제대로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응답자들이 오픈 프라이스에 대해 알게 된 경로는 뉴스와 인터넷이 가장 많았고 신문이 뒤를 이었습니다. 각종 매스컴을 통해 제도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를 얻게 되는 응답자 중 일부는 자칫 오픈 프라이스에 염세적인 보도를 통해 제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이 제도는 나쁜 것이다.’라는 편파적인 시각을 가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재가 스마트폰 시대로 전향해가는 시점인 것은 분명하나, 이 제도가 스마트폰 유저만을 위한 제도는 아닙니다. 과자 한 봉지를 사자고 일일이 인터넷을 확인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소비자들이 적시에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쉬운 가격비교 체제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제조가격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의 할인표지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동네 슈퍼와 심지어 대형 유통업체에서 까지도 ‘아이스크림 전품목 30~50% 할인’ 이라는 근거없는 세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픈 프라이스 시행 이후 유통업체에서 산정한 가격이 이전 공산품가격보다 높아 할인을 적용해도 더 비싼 돈을 주고 구매를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인근에 가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칫 독점력을 이용한 가격횡포도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다행히 필자의 동네에는 100미터 근방에 2곳의 영세마트, 2곳의 편의점, 1곳의 기업형 슈퍼마켓이 있지만, 이나마도 실제 방문을 통해 확인한 결과 가격 차이가 확연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물며 인근에 가게가 없는 낙후한 지역의 경우에는 가격차이가 나는 것을 알면서도 먼 거리 탓에 비싼 가격을 감내하고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픈 프라이스 제도.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해 온 사례를 볼 때 좋은 제도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우리나라 시장에서도 바람직한 효과를 내도록 만드는 것은 제도를 입안하는 정부의 능력이기보다, 무엇보다 현명한 소비자들의 양성입니다. 제도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소비자들이 있다면, 유통업자들은 자연히 공정한 가격 경쟁에 힘쓰게 되고 결국 소비자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품이 공급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60일 입니다. 아기가 아장아장 기는 것도 빨라야 100일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현명한 소비자를 만나고 저렴해진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가는 소비자의 소중한 소리에 귀 기울여 홍보에서부터 지원과 관리에까지 부단히 힘쓰려는 정부의 노력, 그리고 어린 아이 부리듯 투정하는 소비자를 넘어 성숙한 비판을 해낼 수 있는 우리네의 성장에 달렸습니다.
빨리 만나뵙기를 바랍니다. 500원짜리 '악어바'를 구매하는 스마트한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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