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루마블 경제이야기/블루칩 경제정책 이야기

2010년 다시 생각해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53년 6.25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 경제는 생산시설이 대부분 파괴된 폐허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로 연명했으나 미국도 국제수지와 재정적자가 커지면서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1961년 원조감축 계획을 통보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1961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고 효율적인 경제개발을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세계 유례 없는 성공적인 경제개발계획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대성공을 거뒀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1년 100달러 미만에서 1995년 1만달러를 넘어섰다. 같은 기간 제조업 비중은 15% 미만에서 30%로 늘었고, 수출 비중은 1% 미만(4,100만달러)에서 28%(1,250억달러)로 급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나라들이 전후 경제를 재건하거나 식민지 및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지만 우리나라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곳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층이 강력한 의지로 경제 발전을 추진했고 국민들의 ‘잘살아 보자’는 의지와 잠재력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과 정권 내부의 도전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정치적 안정을 토대로 모든 경제정책을 원하는 대로 강력히 추진할 수 있었다.

부총리 부서인 경제기획원은 계획의 수립과 정책조정 그리고 예산, 외국자본 조달 및 배분, 통계관리 등 계획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장악해 일사불란한 정책 추진이 가능했다. 특히 예산을 가지고 정부 전 부처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고, 외국자본 배분을 통해 민간기업들에게까지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정부는 경제성장률과 산업별 생산수준, 총투자의 규모, 저축투자 계획, 외자조달 계획 등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시기별로 주요 목표를 정해 경제발전의 방향을 설정하고 관료, 기업가, 일반국민 등 사회구성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는 신호를 보냈다. 2차 계획에서 7억달러 수출 달성과 수입대체 촉진, 식량자급과 산림녹화, 가족계획 등을 제시했고, 3차 계획에서는 중화학공업 건설과 공업의 고도화, 과학기술의 급속한 향상과 교육시설 확충, 4대강 유역 개발 등을 내세웠다. 5차 계획에서는 물가안정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10% 이내 안정, 경쟁촉진, 국민 기본수요 충족 등 새로운 목표가 나왔다.


선택과 집중, 성장ㆍ수출 중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원칙은 철저한 선택과 집중이다. 경제발전 정도와 사회여건 변화에 따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가 달라지긴 했지만 거의 빠지지 않고 매번 계획에 반영된 것은 성장과 수출, 생산과 저축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제2차 오일쇼크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던 시기의 5차 계획에서조차 물가안정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도 ‘7~8%의 지속적 성장 달성을 위해 투자효율을 극대화하고 저축을 증대시킬 것’, 그리고 ‘수출주도 전략 지속’이라는 상반된 목표가 함께 포함됐다.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리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시중보다 낮은 금리, 각종 보조금 지급, 수입제한 조치 등 여러 가지 특혜가 제공됐다. 예를 들어, 무역금융 금리는 1966~1972년에 연 6.1%로 일반대출금리(연 23.2%)보다 17.1%포인트나 낮았다. 무역금융과 일반대출 금리차가 1.5%포인트 정도로 좁혀진 1982~1986년에도 무역금융 비중은 총 대출금의 10.2%에 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우리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강력한 정부 주도의 통제 경제로 인한 폐해도 무시할 수 없다. 경제계획을 성장 중심으로 운영하고 소비자 후생 대신 생산과 저축을 강조함으로써 공급자 중심의 경제관이 형성됐다. 그래서 비효율적인 생산이라도 생산은 유익한 것이고 아무리 합리적인 소비라도 소비는 자제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됐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1980년대 중화학 공업 과잉설비 문제와 지나친 국내산업 보호, 부실기업 양산을 초래한 원인이 됐다.

또 정부주도형 성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정부의존적 태도를 갖게 만들었고 시장기능 활성화를 더디게 했다. 공정한 시장 규칙보다는 재량에 의존한 정부-기업 관계가 형성돼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된 정경유착 관행을 고착화했다. 금리수준 결정, 자금배분에서의 정부 개입으로 건전한 금융산업 발전을 지연시킨 점도 문제다. 저금리의 특별금융, 항상 돈이 모자랐던 공급부족 자금시장에서의 자금할당은 금융시장에서 가격 기능을 상실케 했으며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한 집중 지원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중공업과 경공업의 격차,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격차를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금융부문이 실물부문의 성장을 제대로 뒷받침할 수 없었고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 K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