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Carpe Diem.
많이 들어보셨던 말이죠?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명언 중에 하나인데요,
바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나오는
‘ 현재를 즐겨라 ’라는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해서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학교 학생들은 끊임없이 교육만을 받을 뿐 공부를 제외한 하고 싶은 어떤 것도 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 분)이 학교로 새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키팅 선생님은 공부만을 하던 학생들에게 책에 실린 강압적인 가르침을 찢고 자기 생각을 갖게 했고, 학생들은 생소하고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키팅 선생님으로 인해 자기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부모님과 학교의 압력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꿈과 낭만을 위해 ‘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제가 이제 설명드릴 ‘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 역시 ‘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와 비슷한 이유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 그럼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가 무엇이고, 그 중심에 서있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이에크
경제사의 계보를 따져보면 크게 둘로 나뉘며 순환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자유주의로써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최대한 큰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수정자본주의로 자본주의의 단점을 정부의 개입을 통해 최소화하자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시장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느냐, 정부의 개입을 늘리느냐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대립되고 있는 주장인데요, 이제부터 알아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 노예의 길 > 출간 기념회 당시 (출처: Google Image)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1948년 스위스의 로잔 호숫가 몸 펠르랭, 이곳의 한 호텔에서 하이에크의 책,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의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출간기념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경제학계는 자유주의자들이 설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미국 제32대 대통령 F.D.루스벨트 또한 뉴딜정책이라 하여 구제 ·부흥 ·개혁 등을 목적으로 연방정부의 기능 확대와 대통령의 권한확대로 큰 정부를 실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자유주의자, 하이에크의 출간기념회를 반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하이에크의 출간기념회에 온 사람은 36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자유주의자로써 자유주의에 대한 염원으로 즉석에서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를 출범시키게 됩니다.
마치 공부만을 강요하는 부모님과 학교에 대한 반격으로 시작된 ‘ 죽은 시인의 사회 ’처럼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계획경제, 즉 수정자본주의에 대한 반격으로 ‘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를 출범시킨 것입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그들만의 조용한 출발이었지만 훗날 이 모임은 경제사에서 신자유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정자본주의자들에게 눌려 지내던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기를 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부터입니다. 그 계기는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 10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원유고시 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한데 이어서,
이스라엘이 원유생산을 감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중동이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따라 73년 초 배럴당 2달러59센트였던 중동산 기준원유 값은 1년 만에 약 12달러로 무려 4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하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그 외 국가들은 석유라는 원자재가격의 상승으로 생산원가 자체가 상승하며 물가가 상승하였고, 물가 상승으로 판매가 부진하게 되면서 실업률 또한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즉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하는 최악의 상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발생한 것입니다.
본래 경제학계에서는 경제가 좋아서 사람들의 수요 증가로 물가가 상승하면 좋은 경제상황으로 실업률은 하락하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낯선 괴물에 수정자본주의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정부의 개입 자체가 물가와 실업률이 반대로 움직인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정책이었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 오자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의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일제히 반격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구사회에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는 자유주의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대변하는 모임이었고, 영국의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평가받으며 ‘ 대처리즘Thatcherism ’이라 불리는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의 정책도 대부분 ‘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 멤버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또한 미국의 경제를 다시 살리는데 기여한 레이건 대통령의 ‘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를
만든 참모진 76명 중 22명이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멤버였습니다.
이렇게 세계가 수정자본주의에 실망하면서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혼란한 세계 경제 상황을 안정시킨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고, 하이에크의 출간기념회에 와있던 ‘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의 창립멤버인 밀턴 프리드먼 역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경제학계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정자본주의의 대가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였습니다.
그의 진가는 ‘ 대공황Great Depression ’을 통해서 발휘됩니다. 대공황의 발단은 1929년 미국의 주식시장 폭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1939년까지 세계적으로 경제가 침체하는 하강국면을 맞이하게 되죠. 대공황의 참담함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가 실업률입니다.
대공황이 발생하기 이전인 1929년 초, 미국의 실업률은 3% 수준이었으나 공황의 수렁이 깊어지면서 1933년에는 25%까지 증가했습니다. 심지어 1933년 농업부문을 제외한 실업률은 무려 37%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으니 그 경제적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지경이었습니다.
케인즈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던 하이에크와 세기의 대결을 펼쳤습니다.
결국 ‘ 대공황 ’의 해법에 대한 승리는 케인즈가 성취했습니다. 케인즈의 주장으로 미국의 F.D.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탄생하였고 그 정책으로 인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나 사회에서 푸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답이 분명히 있는 것도 있지만 답이 없는 문제 또한 상당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하실 것입니다.
경제 문제에 대한 정답 또한 없으며 상황에 따라 이 답이 될 수도, 저 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나 케인즈와 같은 수정자본주의자 모두
좀 더 나은 현실을 바라는 훌륭한 학자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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