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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경제이야기/블루칩 경제정책 이야기

엄마의 집안일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흔히 "지구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는 우스갯소리를 하죠. 남자, 여자, 그리고 아줌마! 집안일에 직장 일에 아이들까지 키워내는 슈퍼우먼들을 보며 우리는 존경과 놀라움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가사노동이야 말로 가장 큰 스트레스자 여성의 사회참여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죠.

지난 11월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서울 워커힐 호텔 4층이 분주해졌습니다. 다소 신선한 개념의 세미나가 열린 덕분이었습니다. 가사노동과 여가가 포함된 사회발전 지표 개발을 위해 '생활시간 연구 국제회의'가 열렸는데요. 통계청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국제대학원이 함께 준비한 자리였습니다. 이날 회의에선 통념과 편견을 깨는 이야기와 토론이 오갔습니다.



사회발전지표, 생활시간조사가 뭘까?

사회발전지표는 한마디로 우리 사회의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이 수치들을 보며 미래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지표를 통해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조율해가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GDP입니다.
생활시간조사는 쉽게 말해 한국인의 라이프 패턴을 촘촘하게 분석해 내놓은 자료입니다. 국민들이 하루 24시간을 어떤 형태로 보내고 있는지를 파악해 국민의 생활방식과 삶의 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측정하냐구요? 조사자가 사람들을 방문해 면접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10분 간격으로 설계된 시간일지에 자신이 한 행동을 일기쓰듯 쓰구요, 응답자는 이틀동안 직접 기입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모아진 자료를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날 회의에선 생활시간조사를 통해 '한국인과 세계인의 삶 패턴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질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인 여가와 가사노동을 반영해 사회발전지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초점이 모아졌습니다. 



경제성장률이 모든 것을 말하진 않는다

회의에선 "가사노동의 가치가 빠진 현재의 경제성장률 지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으로 힘이 모아졌습니다. 가사노동과 여가는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경제발전을 논할 땐 너무도 당연하게 빠져있는 부분이지요. 웰빙열풍에서 볼 수 있듯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패러다임 앞에서 사회발전 지표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수치화해서 반영할 수 있는 국민소득 평가방법은 필수겠지요.

이인실 통계청장의 개회사.

이인실 통계청장은 이번 회의의 개막을 알리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사노동의 가치가 배제된 경제성장률 지표는 실상을 왜곡할 수 있다. 이제 물량적 지표만으로 국민의 삶을 평가하는 전통적 방법은 개선돼야 한다." 이번 회의가 가진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다양한 경제지표와 사회발전 지표들에 이들이 포함되지 않았던 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가사노동은 시장을 통해 거래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에도 계산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가사노동을 배제하기엔 그 경제적 가치가 무한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전업주부가 취업해 그동안 자신이 전담하던 가사 활동을 가사도우미에게 유료로 맡기면, 이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가사노동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어 GDP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GDP 증가율이 실제보다 높아지게 되지요. 

여성의 사회 활동이 증가하면서 경제성장률 지표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입니다. 이제 사회발전지표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합니다. 



휴식의 소중함과 집안일의 위대함

제가 유심히 지켜본 회의는 첫 번째 세션인 "생활시간조사 데이터를 통해 본 노동시간" 이었습니다. 평소 관심있는 주제였고 일과 휴식이야말로 우리 삶과 가장 직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션은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John Robinson 교수가 좌장으로 나섰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지켜보면서 지난 6월에 봤던 한 보고서가 생각나 씁쓸해졌습니다. LG경제연구원이  2009년 통계청 생활시간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인의 하루 24시간'을 정리했는데요. 한국 사회에서 30-40대가 가장 무미건조하고 피곤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연령층에 비해 여가생활 시간은 가장 적고, 일과 가족 보살피기 등 의무생활 시간은 가장 많기 때문입니다. 

여가와 가사노동은 우리 삶에 보이지 않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휴식없이 일만 하는 삶은 결국 에너지가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허약해진 심신은 결국 부실한 노동성과, 생산성 하락으로 연결되구요. 그 뿐이 아닙니다. 여성들의 부지런한 집안일 없이 가족의 편안한 가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고민해볼 주제입니다.


(2009 통계청 조사, 생활시간조사를 기반으로 한 통계)


그래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길쭉한 막대, 보이시나요? 우리의 여가시간은 다른 일을 할 때와는 압도적으로 시간의 양과 밀도가 다릅니다. 요일평균으로 따진 여가시간의 활용은 전반적으로 취미와 그 외 여가활동이 49분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스포츠나 집밖의 레져활동은 29분,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것이14분, 걷기와 산책이 13분 등의 순으로 다양한 여가시간활용도가 나타났습니다. 전체적으로 휴식과 취미생활을 통한 여가시간 활용이 만족도가 높은 것을 볼 수 있지요.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여가와 집안일. 이들을 다시 경제적으로도 새롭게 조명해야 할 때입니다.


집안일과 업무에 시달리는 한국 여성들의 현 주소


-필수생활시간 : 수면, 식사 및 간식, 기타 개인관리 시간
-의무생활시간 : 일, 공부, 가사노동


한국·미국·독일 성인(20~74세)들은 하루에 거의 절반(45%)을 필수생활시간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의무생활시간은 한국 여성이 7시간 58분으로 가장 깁니다. 미국 여성은 7시간 31분, 독일 여성은 6시간 57분이구요. 한국 여성들은 집안일 뿐만 아니라 업무 노동 압박도 받다보니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국·미국·독일 성인 여성들의 의무생활시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은 가사노동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 나라 여성들이 하루에 집안일을 얼마나 하는지 평균을 내보면 한국은 4시간 9분, 미국은 4시간 2분, 독일은 3시간 38분으로 나옵니다. 역시 한국 여성들이 집안일에 쓰는 시간이 가장 높습니다. 




집안일에 나서는 아빠들이 조금씩 삶의 질을 바꾼다

2009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대한민국생활시간 조사에 의하면, 한국 남자들이 집안일 하는 시간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모와 건강관리 등 개인을 위해 쓰는 시간이 10분 정도 크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아빠들은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투자하길 원하며, 집안일에 대한 당위성을 조금씩 인정하고 있어 책임감을 나눠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가 가능한 개인공간과 가사분담의 부담을 덜어주는 공간이 필요하겠지요. 이를 공략해 '아빠 마케팅'으로 새로운 블루오션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집안일에 나서는 아빠들 덕분에 이런 사업이 뜰 것 같네요.


최근 아파트들은 내부 인테리어를 할 때 남성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만들고 신경 씁니다. 일례로 수원에 새로 지어진 한 아파트는 파우더룸을 두 개로 늘렸습니다. 이 더블 파우더룸에선 부인 뿐만 아니라 남편도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외모를 가꾸고 화장품을 구비해둘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 배려가 가정의 평화와 삶의 질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큰 변화겠지요 ^^




새로운 사회발전지표가 삶의 질을 바꾼다


우리 삶이 조금씩 여유와 휴식에 눈을 돌리는 만큼, 사회발전지표에도 거시적인 경제성과만을 반영하는 한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밀도를 가진 것이 휴식과 집안일이기 때문이죠. 경제적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플랫폼이 개발돼야 하겠지요. 우리는 엄마의 집안일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지만, 이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있진 않습니다. 통계청에선 이를 감지하고 새로운 사회발전지표 개발에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 속 즐거운 휴식, 가정 중노동인 집안일이 이젠 경제적인 부가가치로 환산될 수 있도록 눈 크게 뜨고 지켜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