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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문헌보관소/편지 쓰는 장관

글로벌 내비게이션, 우리가 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오는 23일 워싱턴에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열립니다.
잘 알겠지만, 대한민국이 의장국이 되어 회의를 주재하고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게 됩니다. 내구성 강하고 균형잡힌 세계경제질서를 우리의 리더십으로 디자인해야하는 일입니다. 건국 이후 처음입니다.


아울러 2012년에는 『핵 안보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됩니다.
아시아 변방의 분단국이 경제에 이어
세계안보에서도 이니셔티브를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핵위험에 처한 한반도가 앞장서서 『핵 없는 세계』로의
출구를 열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직원 여러분
G20회의를 준비하면서 수십년전 우리 경제사의 풍경을 하나 떠올렸습니다.
60~70년대에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 대단한 수출품목이었습니다.
우리의 누이 또는 어머니들은 동생 학비 때문에, 혹은 부모님 약값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고, 리어카를 끌고 전국을 누비며 머리카락을 수집해오던 엿장수ㆍ고물상들은 든든한 수출역군이었습니다. 가발에 묻은 서캐(이의 알) 때문에 클레임이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또 버스터미널이나 학교 화장실에 소변 수집용 흰색 플라스틱통이 놓여 있고, “국민 여러분의 소변에서 추출한 유로키나제를 외국에 수출하오니 적극적인 협조 바랍니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일 보는’ 것이 애국이었다고나 할까요.
잔디씨 수출을 위해 학생들은 방과 후에 잔디씨를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솔방울은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용으로 수출되었고, 다람쥐, 갯지렁이, 뻔데기 등 팔릴 수 있는 것은 죄다 모아 해외에 팔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출할만한 변변한 공산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절을 거쳐서 우리나라는
60년대 중반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합니다.
지금은 그 4천배인 연간 4천억달러를 수출하고, 자동차에서 원전까지 파는 세계교역시장의 강자가 됐지만, 그 바탕에는 이런 서글픈 풍경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이렇게 눈물겹게 키워온 경제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위기에 강하고, 지속가능하고,
균형잡힌 경제』로 만들어 놓아야합니다.
흥망과 부침의 역사적 변환기인 지금이 적기입니다.
우리는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위기 이후의 미래를
선점하기위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막 그 첫걸음을 내딛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하던
 유가(儒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등의 제자백가 가운데 종횡가(縱橫家)라는 학파가 있습니다.
“소국들이 연합해서 대국과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합종책과,
“소국이 대국과 동맹해 안전을 꾀한다”는 연횡책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쉽게 말해, 타국을 설득하고 나라간 이해를 조정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G20회의체를 통해 글로벌 불균형, 금융규제, 출구전략 로드맵, 금융안전망, 저소득국 개발  등
의제 전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할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어느 의제 하나 만만한 게 없습니다.
대부분의 의제에서 각국의 처지가 다르고 이해가 충돌합니다.
경제는 자로 재고 저울로 달 수 없다보니,
현재의 국면에 대한 상황진단도 나라별로 많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의나 당위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타협점을 찾기 힘듭니다.
만약 여우에게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니 네 털가죽을 내놓으라”고 할 경우
여우가 그 치명적인 거래에 응할리 없겠죠.

따라서 각국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 이해를 조정하고,
상생의 공약수를 찾아내 중재하고,
높은 수준의 원칙과 결단을 요구하는 역할을 해야할 것입니다.
논리의 골격을 반듯하게 보완해서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재정부 직원 여러분
우리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낼 때
대한민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큰 걸음을 내딛고,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의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실낱같은 회복을 넘어 우리경제의 맥박이 쿵쿵 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제발전 경험을 나눠주고, 원조국 지위를 획득하고,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신용등급 상향조정을 이뤄낸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방향을 잡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사실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중압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노력이 반영된 10~20년 후의 한국경제를 떠올리면
감출 수 없는 설레임과 흥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응원을 ‘원기소’ 삼아 스스로를 북돋우겠습니다.
여러분이 제 밑천이고, 제 자부심입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2010. 4. 19 
          
                             

   


드림


追伸 : 천안함 희생자들의 주검 앞에 온 나라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유족이 아니어서 상복을 입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상복을 입은 경우”를 심상(心喪)이라고 하는데, 온 국민이 심상중(心喪中)일 것입니다.   또한 차관 인사 등으로 우리 조직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가 자기자리에서 맡은바  업무에 충실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현장과 호흡하고, 상황을 장악하고, 핵심에 집중하는 자세를 다시  한번 주문합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