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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문헌보관소/편지 쓰는 장관

성공하고 또 성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이제 며칠 뒤면 한해를 접습니다.
마치 갑옷을 벗지않은 채로 지낸듯한 한해였습니다.

취임 첫날을 떠올려봅니다.
겪어보지 못한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앞에두고,
저는 집무실에 걸린 수십명의 역대 장관들 사진을 찬찬히 훑었습니다.
그리고 “저분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경제관료로서도 제게 든든한 교사이자 나침판 같았던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할수만 있다면, “답을 가르쳐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1년을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내린 판단과 좌표와 방향에 대해 겉으론 의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 마음을 졸인 적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어렵다고 돌아가거나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단시간에 대규모 민생추경을 편성해 돈을 제때 제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고, 내수 위축을 막기위한 재정조기집행도 착실히 진행했습니다. 금융ㆍ외환시장을 안정시켰고, 공공부문을 효율화하고 정부가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고 지켰습니다. 무엇보다 G20 정상회의를 유치해 국제경제질서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참여하게 되었고, 여러지표들도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반전시켜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린 한해의 저물녘에 국제기구나 외신 등으로부터 “가장 빠르고 모범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대견스럽습니다. 정말 수고많았습니다.
아울러 올해 혹시 제 말결에 날이 선 순간이 있었더라도 “마음이 바쁘다보니”라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직원 여러분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취임 다음날 성남 새벽인력시장에서 만난 그 아저씨는 올해는
공친 날이 좀 적었을까?
광장시장에서 만난 구부정한 할머니의 좌판 사정은 좀 어땠을까?
국제기구 취업박람회에서 마주친 그 절박한 눈망울의 젊은이들은 지금 뭐하고있을까?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학습없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들, 그러니까 본능에 의해 저절로 되는 것들은 강합니다.
갓 태어나 눈도 못뜬 강아지가 용케 어미 젖을 찾아내 맹렬하게 빨아댑니다. 씨앗은 제몸을 썩혀가며 새싹을 한뼘씩 땅 위

로 밀어올립니다. 남대천에서 태어난 어린 연어는 알래스카와 캄차카반도를 휘돌아 기어코 남대천에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사람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이런 본능의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우리 기획재정부가 맡은 업무입니다.
서민의 살림이 펴지지 않았다면, 우린 경제지표 반전에 대한 자부심을 아직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들께 송구한 마음입니다. 경제위기의 원인이 무엇이든 정부는 민생에 무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직원 여러분
지표를 체감경기로 연결시켜야하는 숙제 앞에서 내년 역시 녹록지 않은 한해가 될 것입니다. “풀어진 거문고 줄을 다시 바꾸어 맨다”는 해현경장(解弦更張)이란 말이 어울리는 해가 될 것입니다.
특히 일자리가 핵심입니다.
일자리는 소비와 투자를 불러오는 선순환의 연결고리이지만 임금 지급이나 소비창출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일자리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 가족 해체 방지, 사회통합, 긍정적 감성의 확산 등은 경제 재도약을 위한 커다란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새해 예산 통과가 늦어져 서민 관련 여러 사업을 시작하지도 못하거나, 재정을 연료삼아 이제 겨우 민간 동력을 얻기시작한 우리 경제가 다시 비틀거릴까봐 두렵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가장 힘든 사람은 경제적 약자들입니다.
서민 자영업자 실직자 미취업자 여성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들의 고단함이 누적되지 않길, 돈을 제때 제대로 쓸 수 있게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저는 2009년의 마지막 휴일에도 기어코 직원들을 불러내야했습니다.
일단 준예산을 준비해 놓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입에 발린 것처럼 일년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또 그렇게 됐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젠 야근 안했냐”며 성탄절 연휴에 아무렇지않다는듯 야근을 준비합니다.
씩씩한 표정이 더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에게 참 많은 빚을 진 한해입니다.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2009.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