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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세종청사 일기

“총성없는 고지전”- G20 장관회의 뒷 얘기

# 지난 7월 19일 ~ 2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회의에 참석한 실무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지난 週 세계의 이목은 러시아 모스크바로 집중되었다. 19∼20일 양일간 열린 ‘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회의’ 결과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졌던 것이다. 최근 버냉키 美 연준 총재의 출구전략 시사 발언으로 세계 금융시장 불안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번 회의가 내놓을 메시지의 내용과 수준에 따라서 금융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은 자명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각 국 장관ㆍ총재 합의를 통해 “선진국 통화정책 변화는 신중하게 조정(carefully calibrated)되고 시장과 명확히 소통(clearly communicated)되어야 한다”는 명확한 메시지가 도출됨에 따라, 각 국의 금융시장은 일단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TV 화면과 신문 사진에 비추어진 장관ㆍ총재들은 미소를 띠고 있고, 회의장에서의 발언 역시 다른 나라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표현 없이 극도로 정제된 것이 대부분이다. 회의를 모두 마치고 채택된 공동선언문인 코뮤니케(communique) 또한 어찌보면 외교적 수사로 가득하다. 마치 조용한 호수 수면 위를 여유롭게 떠나니는 한 마리의 고고하고 화려한 백조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하지만, G20에서 국제공조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의 이면에는 회원국간 치열한 다툼이 자리잡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그 핵심은 바로 코뮤니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양보없는 샅바 싸움’, 유리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펼쳐지는 ‘총성없는 고지전’에 비유되는 G20 실무작업을 둘러싼 뒷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통상 G20 회원국들은 실무선에서 글로벌 경제 이슈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과 의견을 의장국과 다른 회원국에게 수시로 전달하고, 때로는 실무회의를 개최하여 의견을 조율하는 작업을 연중 진행한다. 이번에도 장관회의 한 주전에 거시정책공조 실무그룹 회의가 모스크바 현지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은 사전에 우리 입장을 담은 컨셉페이퍼(concept paper)를 배포함과 아울러, 실무그룹 회의에서도 출구전략의 부정적 파급효과와 G20 대응 필요성을 선도적으로 제기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이번 장관회의에서 출구전략 공조 합의가 도출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실무작업이 집약되어 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열리기 3∼4일전에, 코뮤니케 초안이 모든 회원국과 IMF를 포함한 국제기구들에게 회람된다.


회람된 코뮤니케 초안에 대해 각 나라들은 치밀한 검토와 분석을 거쳐 자신들의 입장과 전략을 정하게 되고, 이후 자신들의 검토의견을 회의 개최전 의장국과 회원국에 회신하는 과정을 밟는다. 회신 방법도 국가별로 다양하다. 많은 국가들이 회의 하루전쯤 다른 국가들의 반응을 감안하여 자신들 의견을 회신하는 전략을 일반적으로 택한다. 초반 분위기를 선점하고 다른 우호국의 지원(echo)을 요청하는 차원에서 일찌감치 회신하기도 하고, 정반대로 자신들의 패를 감추기 위해 아예 회신을 하지 않는 국가도 더러 있는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모스크바 장관회의가 열리기 하루전인 18일 오전 9시반에 통상 드래프팅(drafting)이라고 불리는 코뮤니케 문안작업이 시작되었다. 국가별로 한 자리가 배정되는 대표로 각 국 차관 또는 차관보급이 참석하게 되며, 테이블 뒷 자리에 한 명의 배석이 추가로 허용된다. 대표와 배석자 이외의 참관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드래프팅 장소는 협소하기 그지 없고 각 국 대표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공기까지 혼탁하다.


오전중에는 당초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복병이 등장하였다. 중기 재정건전화 노력을 지속해야 하는 국가를 미국과 일본으로 명시하는 내용을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들고 나오자, 미국 대표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삿대질까지 오가는 험악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결국 의장국 중재로 ‘미국과 일본’ 부분을 괄호로 처리(bracket이라 하며, 장관회의 최종결정으로 넘김)키로 하면서 긴 논란이 일단락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장관회의를 거쳐 최종 코뮤니케에는 ‘선진국’으로 변경되었다.)


네 시간여에 걸친 오전 회의가 마무리되고 30분 남짓 회의장 옆에 마련된 오찬장에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오후 회의가 지체없이 속개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이슈인 출구전략 국제공조에 관하여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 전개된다. 우리나라는 신흥국들과 연합전선을 펴는 한편, 逆 파급효과를 설파하며 미국 등 선진국을 설득하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전개된 결과 ‘조정과 소통’이라는 절묘하고도 간결한 문구에 합의하면서 가장 커다란 전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싸움이 끝났다고 속단하여 방심할 수는 없는 일. 문단별로 검토가 진행되면서 문안을 삭제하고 수정하는, 지루하지만 치열한 각개전투가 벌어졌다. 과거 정상회의와 장관회의 코뮤니케 모음집을 마치 법전처럼 준비한 각 국 대표들이 문장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단어 하나 하나, 심지어 문장 순서까지 사활을 걸고 달려든다.


싸움은 IMF 쿼타 개혁을 논의하는 시간에 발생하였다. 2010년 서울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IMF 쿼타공식 개편에 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단어 선택의 문제로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쿼타공식이 수정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초래되는 나라 중 하나가 코뮤니케 초안에 기술된 '새로운 쿼타공식'(new quota formula)이라는 표현이 쿼타공식 수정을 기정사실화할 수 있으므로 ‘new’를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몇몇 나라가 이에 동조하는 목소리를 내자, 주요 신흥국들이 과거 수 차례 코뮤니케에 포함된 단어를 삭제하는 것은 IMF 쿼타 개혁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며 거세게 반발, 결국 원안 그대로 합의하게 된다.


단어 선택에만 싸움이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이슈가 논의되는 경우 관련된 문안 전체를 사수하거나 아예 삭제하기 위해 사활을 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드래프팅 작업은 몇 시간씩 지체되는 일이 다반사다. 특히, 금융, 조세, 에너지 관련 이슈에서 이런 일이 두드러져, 특정 국가가 1:19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야말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소위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자행되어도, 전원 합의가 원칙인 G20의 속성상 이를 묵살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몇 시간째 교착 상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의장이 중재안을 제시해 회원국 동의를 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국 대표들은 수시로 장관들에게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장관들의 지침(mandate)을 받아 다시 협상에 임하는 절차가 무수하게 반복된다. 긴급한 사안에 대해 장관들의 지침을 얻기 위해 새벽에 장관 숙소의 문을 노크해야만 하는 일도 벌어진다.


최근 들어 드래프팅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국가간 勢 규합과 대결도 회의장에서 갈수록 노골적으로 이루어진다. 출구전략과 관련해서는 미국ㆍ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 연합군과 BRICSㆍ한국 등이 뭉친 신흥 연합군 사이에 펼쳐지는 氣 싸움이 팽팽하였다. 하지만, G20 세계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敵도 없는 법. 재정건전성 확보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선진국 사이에서 분열이 발생하는 등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 분야 논의가 몇 시간씩 휴식 없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완전히 비우는 나라는 찾기가 어렵다. 논의 순서에 무관하게 급작스러운 기습공격이나 매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5년 가까이 재무부에서 근무한 어느 국가의 백전노장은 남들이 방심한 틈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수시로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공격이 이루어지면 관련 국가들은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상황에 처해 방어에 급급한 딱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G20 장기근속자 가운데에는 화장실을 제 때에 이용하지 못해 직업병을 얻는 경우가 많다하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날 드래프팅임에도 불구하고 15시간 넘게 열띤 토론이 지속되고, 드디어 밤 11시 잠시 잊었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30분간의 짧은 저녁식사 시간이 주어졌다.


18일 자정을 넘겨 새벽 3시까지 진행된 드래프팅 작업은 대표들이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다음날인 19일 오전 9시에 다시 속개되었다. 이번에는 쉬는 시간도, 점심먹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 분야에서 에너지 생산국과 소비국간 힘 겨루기가 간단치 않아 몇 시간째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지고지난했던 작업이 모두 끝났다. 순수 작업시간만 25시간, 종전 기록(21시간)을 넘은 신기록이다. 한국 대표단 실무자들의 연속 7회 컵라면으로 식사 때우기 기록도 함께 세워졌다.


기나긴 싸움을 마치고 잠시 방전의 시간. 방금전까지만해도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하던 사람들끼리 악수를 하고 농담을 건넨다. 하지만 이내, 저녁부터 이어지는 장관회의 환영만찬에 앞서 각기 자신들의 장관들에게 협상결과를 브리핑하기 위해 피곤한 몸을 곧추 세운다. 다시 각자의 참호로 돌아가 다음번 백병전을 준비하는 병사들처럼...


이렇게 이번 장관회의에서는 총 아홉 페이지에 걸쳐 38개 문단, 그리고 수백개 문장으로 이루어진 코뮤니케가 탄생하였다. 세계경제와 금융시장 안정에 관한 고민이 깊어갈 수록, 물 아래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백조의 물갈퀴질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