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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문헌보관소/편지 쓰는 장관

[윤증현 장관 이임사] 마음만은 늘 우리 경제를 응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 곁을 떠나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공직생활 내내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지만,
막상 이임을 준비하자니
마치 지병(持病)처럼 또 가슴이 미어져 옵니다.
이별은 여러 번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내성(耐性)도 생기지 않는가 봅니다.

옛날 상월 선사가 월락불이천(月落不離天),
즉 “달이 진다고 하늘을 떠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과 헤어져도
마음만은 늘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과 우리 경제를 응원할 것입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글로벌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초
기획재정부 장관에 취임했습니다.

‘미증유의 경제위기’,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래 최악의 대공황’과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지던 시기였습니다.

취임당시 저는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국민과 시장으로부터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 첩경은 정직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성장률 전망을 수정하는 등
국민들에게 경제상황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정부정책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 시작했으며,

시장과의 소통과 공감을 바탕으로
사상 최대규모인 3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등
과감하고도 선제적으로 정책을 속도감있게 진행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우리는
달리면서 동시에 판단했고,
매뉴얼도 없이 위기에 맞섰고,
일과 휴식의 경계도 없이 싸웠습니다.
마치 휘모리장단처럼 숨가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글로벌 경제위기의 한복판을 살아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금융,외환시장을 정상화시키고,
속절없이 추락하던 지표를 결국 반전시켰습니다.
2010년에는 6.2% 성장, 2.9% 물가, 32만개 일자리 창출로 “교과서적 경기회복(textbook recovery)”이라는
외신의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국가 신용등급이 원상회복 되었고,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올라섰습니다. FTA의 확산을 통해 국토는 좁지만
경제영토는 가장 넓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특히,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국제경제질서의 Rule-Taker에서 Rule-Maker로
약진할 수 있었습니다.
‘강하고 지속가능하며 균형잡힌 발전’이라는
세계경제의 지향점은 바로 우리가 만든 내비게이션입니다.

G20 의장국으로서의 지난 1년은
과거 언제나 변방에 머물렀던 대한민국이
어느새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한 것을 외국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깨닫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G20은 분명 대한민국 근대경제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위기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didn't waste a crisis)".
물러서지도 않고 비켜서지도 않은 채,
당대의 과제를 당대의 방식으로 풀어낸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물가, 일자리, 성장동력 등
몇 가지 미흡한 과제에 이르면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물가의 경우,
국제 원자재값 상승과 기후변화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에서 촉발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고물가는 특히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더욱 팍팍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국민들께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걸리고,
경제체질 개선과 신성장동력 분야에서,
그리고 서비스산업 선진화부문에서도
뚜렷한 결과물을 창출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많은 숙제를 남기고 떠남에도
다양한 경륜으로 무장한 신임 박재완 장관에게
바톤을 넘기게 되어
한결 제 마음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이제 떠나가는 장관으로써,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몇 가지 당부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첫째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장」입니다.

경제가 나아졌다고 하면
지표뿐 아니라 국민들의 삶이 나아져야 합니다.
‘몸이 곧은 데 그림자가 굽을 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이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경기가 지표경기와 다르다면 우리가 더 분발해야 합니다.

서민과 실직자, 여성과 노인,
그리고 영세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고단함을 배려하고,
경제적 약자를 부축하는 재정부를 기대합니다.

둘째, 「재정건전성」입니다.

경제발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국민의 삶의 질 제고에 있다는 점에서
복지의 확대는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복지의 확대 또한
우리 경제가 지탱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중장기적인 재원배분의 틀에 맞추어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재정위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진국을 보면서
얼마나 빨리 선진국이 되는가 보다는
어떤 선진국이 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 유행처럼 번져 나가는
‘무상(無償)’이라는 주술(呪術)에 맞서다가
재정부가 사방에서 고립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립을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재정의 마지막 방파제가 되어야 합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말처럼
“원칙의 문제에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길” 기대합니다.

셋째, 「시장과의 소통」입니다.

국가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시장원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시장이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료는 늘 개입과 간섭의 유혹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에서 보듯
시장이 해야 할 일에 정부가 나서서
성공한 사례는 없습니다.

보다 많은 분야가 시장원리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고,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여건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시장의 작동을 위해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일 수도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을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한번 수립한 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하며,
추진과정에서는 원활한 피드백이 이루어져야
시장의 확고한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제가 취임할 때부터 강조하였던
「전문성과 도덕성, 그리고 글로벌 마인드」입니다.

애플社의 창시자였던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에게 남긴 메시지가
"Stay hungry, stay foolish" 였습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전문성의 원천이라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오만에 빠지지 않는
우직함이야말로 도덕성의 기본일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이제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게
한반도와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를 내다보는
글로벌한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출 때만이
여러분이 우리나라를 이끄는 진정한 엘리트로서,
기획재정부가 경제를 총괄하는 수석부처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직원 여러분.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 마땅한 나라,
개도국에 희망의 증거가 된 이 특별한 나라에서
경제관료로 일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외신들이 ‘미러클’(Economic miracle)이라고
표현하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제 40년 공직생활이 미력이나마 기여한 게 있다면
그 자체가 큰 보상이라 믿습니다.

또한, 열정의 온도가 남다른 기획재정부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늘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들이 제 자산이자 밑천이었습니다.


제 삶이 지나온 자리에 언제나 여러분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언제가 여러분들에게,
침과대단(枕戈待旦),
즉, “창을 베고 누운 채 아침을 맞는다”란 말처럼
항상 갑옷을 입은 채 전장에서 사는 느낌이란
말을 전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2년 4개월동안
한시도 벗을 수가 없었던 마음의 갑옷을
이제 벗고자 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1. 6. 1  윤증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