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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문헌보관소/편지 쓰는 장관

우리는 과연 현장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장마가 참 질깁니다.
장마 사이로 며칠 볕이 드나 싶으면 이번엔 폭염이 사납습니다.
일과 휴식의 경계도 없는 여러분들에게 “휴가 잘 다녀오라”는 말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대신하려했더니 휴가철 날씨마저 보태주는 것이 없네요.
그래도 빠짐없이 휴가들 다녀 오시기 바랍니다.
잘 아다시피, 위기에 맞서려면 팽팽한 긴장감이 불가피하지만,
긴장한 상태로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감은 점차 ‘위기극복 피로감’으로 바뀌곤 합니다.
활의 시위든 거문고의 현이든 가끔씩 풀어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시간에 지지 않으려면 쉬어야하는 것이죠. 
정책도 매한가지입니다.
시간을 이길만큼 내구성(耐久性) 좋은 정책은, 조바심 낼 때가 아니라 멀리 보고 길게 호흡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잘 쉬는 것도 경쟁력입니다. 휴가 기간만이라도 가족과 함께 몸과 마음을 싱싱하게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여러분께 속담에 얽힌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흔히들 “꿩먹고 알먹고”라는 속담 많이 쓰시죠? 일석이조(一石二鳥)를 의미합니다. 하나 더 붙여 “꿩먹고, 알먹고, 둥지 털어 불땐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일석삼조쯤 되겠지요.
얼마전 이 속담의 유래를 듣고 가슴이 짠했습니다.
꿩은 소리에 민감해 작은 인기척에도 푸드득 날아가버립니다.

그중 암꿩은 5~6월에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시키는데, 일단 알을 품기 시작하면 사람이 다가가도 여간해서 도망가지 않는답니다. 심지어 산불이 나도 알을 지키다 타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람 입장에서는 알품는 꿩을 발견하기만 하면 손쉽게 꿩을 잡고 알까지 챙길 수 있는 셈이지요. “꿩먹고 알먹고”란 속담은 이처럼 어미꿩의 강한 모성(母性)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도 아마 꿩의 알 사랑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애지중지 키우고, 아등바등 공부시키고, 반듯하게 가르치면서 꿩이 알품는 심정으로 20년이나 넘게 길렀지요.
그렇게 해서 떡하니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말대로 ‘졸업=백수’라면 부모님 마음이 어떨까요?
상반기 성장률 등 최근의 경제지표가 눈에 띄게 좋아졌는데도 국민들의 평가가 인색한 것은 이처럼 경기회복의 잣대가 달라서일 것입니다.
즉, 부모 입장에서는 “내 자식이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 경기가 회복된 것이지 그 전에는 어떤 지표를 내놓아도 수긍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부모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서민, 자영업자, 중소기업의 마음도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경기 상황은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 수가 없다 보니 회복여부를 둘러싸고 늘 논쟁이 있기 마련이지만, “내 소득이 늘지 않고, 내 가게에 손님이 없는데 무슨 경기회복이냐?”는 취약계층의 진단은 그것대로 늘 맞는 진단입니다. 정부는 지표로 해석하지만, 국민들은 주변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제가 여러분의 하반기 업무 중심에 ‘현장과의 호흡’을 놓아달라고 주문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일에 파묻혀 산다”는 말이 딱 맞을만큼 이 사무실에서 일하고, 저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윗 사무실에서 결재받는 등 온종일 종종걸음으로 정부청사를 헤집고 다닙니다. 밤과 주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정부청사 사무실 그 어디에도 국민은 없습니다.
국민은 현장에 있습니다.
국민에게는 존재감(存在感)이 없으면서 우리끼리 경제지표를 놓고 자부(自負)하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국민과 기업의 한숨소리에 귀기울이고, 작은 민원도 크게 듣는 기획재정부가 되려면 현장과 호흡해야 합니다.
‘성장의 온기가 골고루 확산되는 시스템’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어떻게 고쳐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등등의 물음에 대한 답은 모두 일차적으로 현장에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현장에 이어 하반기에 여러분에게 주문하는 것은 전문성입니다.
G20회의와 IMF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달라진 위상에 놀랐고, 또한 우리가 정말 우물안 개구리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그리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있습니다. 아울러 대내적으로는 대?중소기업이 상생하는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그려서, 중소기업의 닫힌 성장판도 열어주어야합니다.
그렇지만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처럼, 여름철 곤충인 메뚜기가 겨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를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요즘 기업들이 바라는 인재상이 ‘T자형 인재’라던데, 정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종(縱)으로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췄으면서, 횡(橫)으로도 폭넓은 경험과 네트워킹을 보여주는 공무원이 되어야합니다.


물론 전문성이 꼭 본인의 전문성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외부의 전문성을 차용할 수 있는 능력도 전문성입니다.
미국 애플사가 스마트폰 응용 프로그램 시장을 개방하자, 사용자들이 응용 프로그램 수십만개를 만들어 아이폰 기능을 대폭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우리 머릿속의 좌뇌(左腦)와 우뇌(右腦)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이렇게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외뇌(外腦)라고 하더군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반기엔 외뇌도 하나씩 갖고 일합시다.
물론 그 외뇌는 가급적 서민,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역경제에 정책적 윤기(潤氣)를 더하는 데 먼저 써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역사의 전환기는 늘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때문에
높은 업무강도와 팽팽한 긴장감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아울러 남편이나 아내, 혹은 아빠나 자식의 주말과 밤시간을 늘
기획재정부에 빼앗겨야 했던 직원 가족 여러분,
참 많이 미안합니다.
또 고맙습니다.
휴가들 잘 다녀오십시오.


2010년 7월 28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