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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블 문헌보관소/<인터뷰>경제톡톡(Talk Talk)

2009년 한국경제는 어디로 가는가


트리나 폴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이라는 책에서는 작은 애벌레가 주인공이다.
삶이란 그냥 먹고 자라는 것 외에 더 오묘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벌레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올라가기 시작해 하늘 끝까지 치솟은 커다란 기둥을 형성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기둥은 서로 밀치며 앞서 가려는 애벌레 더미였으며, 애벌레들은 무조건 꼭대기로 올라가려고만 했다. 밟고 올라서느냐 밟히느냐 하는 처절한 싸움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위협이자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독하고 무자비해진 애벌레가 기둥에 올라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가 오르고자 하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른 수많은 애벌레를 밟고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연공서열, 종신고용, 조직에 대한 무한충성 등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적 가치’의 기반 위에서 1970~80년대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10여년 전 우리를 덮친 외환위기의 충격과 당시의 거대한 국제조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우리에게 강요하기에 이른다. 연봉제, 적자생존, 무한경쟁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철학은 빠른 시간에 사회를 점령했다. 누군가 왜 우리가 변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사실상 아무도 그에 대해 명쾌히 답해 주지 않았다. 단지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답답한 인간형으로 비춰졌을 뿐이다.

그랬던 신자유주의 철학이 이번에 금융위기를 다시 맞이하면서 대대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이를 공격하는 주축세력은 유럽과 중국이다. 미국이 전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기 전, 즉, 식민지 시대의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은 영미식 자본주의 및 금융철학에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반쯤은 주축세력의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 미국발 위기가 전세계로 퍼져나가 유럽 또한 큰 피해를 받게 되자, 미국식 가치관을 대표하는 신자유주의 철학에 볼멘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좀 더 느긋한 자세다. 사실 중국은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으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저렴한 노동력을 사용해 ‘세계의 공장’ 역할을 수행하며 엄청난 속도의 고도성장을 이뤄낸 이 나라는 이번 위기에서 타격이 가장 적은 편이다. 위기라고는 하지만 5~10%에 달하는 연 경제성장률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이번 금융위기를 가장 먼저 탈출하리라는 데 현재 전문가들 사이에 달리 이견이 없는 듯하다.

중국은 이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동안 기축통화로 군림해 온 달러화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도, 위안화를 새로운 기축통화로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의 기본 철학이 신자유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식의 전략을 추진해 왔지만, 중국이 깊은 속내에 감추고 있는 철학이 신자유주의일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2009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디로 가야 할까?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열에서 벗어나 가장 잘사는 나라의 근방에까지 이르게 해준 동아시아적 가치를 다시 붙들어야 할까, 아니면 ‘썩어도 준치’라는 식으로 거의 용도폐기되어 가는 신자유주의 철학을 계속 고집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인문학적 고뇌를 거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정책들이 마구잡이로 집행되다 보니, 이 사회는 갈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위기를 맞은 금융회사들에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후순위채 등을 매입해 주는 보완적 조치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보통주를 매입하는 직접적 조치를 취할 것인가, 금융회사 임원들에게 제공되는 인센티브의 성격과 규모, 사회 저변에 깔려 사회불안 요인으로 오랜 동안 잠재해 온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 추경예산을 통해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복지성 예산을 늘려줄 것인가 아니면 성장동력을 확충해 일자리를 늘리는 데 사용할 것인가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사실상 동아시아적 가치와 신자유주의 철학 간 갈등선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굳이 금융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산적한 문제들을 외면한 채 해외학술지에 실린 논문만을 우대하는 학문 풍토도 걱정이지만, 교육을 내팽개치고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교수평가시스템도 답답하다. 내용전달 효율성에 있어 우리말 강의의 절반 정도에 겨우 미치는 영어강의를 향한 대학의 무한경쟁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이에 문제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대학의 수월성 평가기준이 그러하기에 별 수 없다고….

하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을 누가 만들었으며,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적합한 기준이냐고 물었을 때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철학은 이미 우리네 뼈 속 깊이 녹아든 기분이다.
우리 삶을 이끌어 갈 중요한 철학적 가치관을 스스로 수립하는 일을 국제조류에 부합한다는 명분 아래 사실상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번 금융위기를 맞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G20 정상회의에서 우리가 의장국이 되어 새로운 세계질서를 선도하게 되었다는 발표를 들으면서도 석연치 않았던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철학적 기초가 다져져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유럽과 중국이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공격할 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국가이익보다 먼 미래를 내다본 우리네 삶의 철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 그중에는 이번 금융위기를 맞아 크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피땀 흘리며 묵묵히 걸어가는 길은 우리 사회가 옳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열심히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단지 이웃들을 짓밟고 우리끼리 싸운 것에 그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앞서 책의 저자는 꽃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우리 희망은 누가 가져다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