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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기관 수기 공모전 여성관리자 부문 

최우수상, 오 ◯ ◯ / 대한지적공사 -



요즘 나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아이들보다 먼저 출근하던 나였지만 요즘은 가끔 중학생인 둘째 아이와 밥도 같이 먹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며 차 조심하라는 걱정까지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초 회사의 첫 여성 관리자, 나의 오늘 


직장생활 30여 년 만에 갖게 된 호사이고 행복이다. 이런 소소한 일상에 대해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건 가족과 회사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우리 둘째 아이에게 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고 살 좀 빼야겠다고 했더니“학교 갔다 와서 아침에 해 놓은 밥 혼자 먹고 학원에 다니면서 생긴 외로움의 배”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직장생활을 해 본 엄마들의 비슷한 고충일 것이다. 이러한 아픔을 슬기롭게 인내했기에 남성 중심 조직 대한지적공사에서 첫 여성 관리자가 될 수 있었고, 일과 가정의 양립 문화를 누리는 수혜자가 될 수 있었으리라.


말수 적은 초등학생, 남자 복이 터진 인생의 시작


단단한 지금의 내가 있었던 것은 바로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보낸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외곽에 살던 나는 초등학교가 시내로 이사하면서 받았던 문화적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농사일로 바빠 검게 그을린 엄마와는 달리 친구 엄마들의 백옥 같은 얼굴과 고운 차림새는 어딘가 범접하기 힘든 거리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허약한 몸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는 체육시간에 교실을 지키거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말하기보다는 묵묵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편을 좋아했다.

여고 졸업 후에도 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던 나는 청주에서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남학생들이 주로 선택하던 지적학과를 선택한 것도 아마 묵묵한 사색에서 나온 소리 없는 배짱이 아니었나 싶다. 희소가치가 있는 학과라는 선배의 말에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된 남성 천국에서의 생활은 나의 잠재력을 찾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했고 부모님께도 못 받았던 관심을 학과에서 넘치게 받으면서 성격도 점차 바뀌어갔다.


여자가 무슨 측량을 한다고? 내 인생의 첫 번째 고비


대학을 졸업하고 1985년 4월 대한지적공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입사하지만 당시로서는 대학을 졸업한 여자 기술자가 입사하는 것은 처음이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본사에서 근무하게 된 나는 전산실 업무를 배웠고, 1996년 4월부터 일선 현장업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억세고 거친 현장의 모습이 그토록 낯설 수가 없었다. 어느 날“본사에서 편하게 있다가 일선에 와서 피해만 준다.”, “여자가 무슨 측량을 한다고…”라는 남자 직원들의 뒷담화를 들으며 주눅이 들어 업무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고비를 겪기도 했다. 입사해서 평생을 측량 업무에만 종사하다 퇴직하는 남자 직원이 전 직원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당시로서는 본사에서 온 여직원이 현장업무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해되지 않던 시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당하던 나는 어느새 울보가 되어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부모님, 선배님과 후배 들의 얼굴이 떠올라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용기를 가졌다.


사표를 출사표로 바꾼, 인내와 용기


직원들에게 측량기술을 기초부터 하나씩 배우면서 평생 흘릴 눈물은 이때 다 흘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시로 퇴사에 대한 갈등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 인생에서 지금의 시간은 기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죽을 힘을 다했다. 그러자 어느샌가 냉소적이던 직원들도 나에게 눈길을 주었고 서서히 그들의 페르소나에 들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는 내가 언제 퇴사하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런 시기를 참아낸 내가 새삼 대견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전국 최초로 현장업무를 하는 여직원으로 인식되어 이때부터 나의 모든 행보에‘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기 시작했다.


복대로 꽁꽁 싸매고 임신도 숨겨야 했던 눈물겨운 추억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나는 직원들이 알까 봐 거의 막달까지 비밀로 해야 했다. 지금은 임신 사실을 자랑스럽게 알리지만 당시는 여직원이 임신하면 죄인처럼 숨기던 시절이었다. 복대로 꽁꽁 싸매고 임신 사실을 숨겨가며 어렵게 둘째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보육은 더 문제였다. 출산 후 갓난아이를 이웃에 맡기는 것이 부담스러워 또 다시 청주에 계시는 친정엄마께 부탁을 했고 돌이 지나고서야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둘째 아이는 보육시설과 개인 집에 위탁을 하며 전쟁을 치르듯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아이가 많이 아플 때가 제일 난감했다. 업무 특성상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보니 남편이 조퇴하고 아이를 돌본 적이 수없이 많다. 퉁퉁 부은 아이들의 얼굴,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아 원숭이 엉덩이처럼 발갛게 부어오른 모습 등 가슴이 무너져 내릴 만큼 막막하고 미안했던 기억… 그 힘들었던 시절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최초의 여성측량팀장이 된 나의 도전~!


우리 아이들을 돌보느라 엄마는 10년 세월을 희생하고 어느덧 노인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의 관절염과 주름,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이런 주변의 희생과 도움이 헛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생활했고 이는 서서히 직장 생활에서 발하기 시작한 빛으로 확인됐다. 2003년, 나는 지적공사 최초의 여성 팀장이 되었다. 측량팀은 세 명이 한 팀으로 구성되는데 남자 직원 두 명을 지휘하여 현장 업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현장 출장지에서 가끔 ‘아줌마’라고 부르며 나의 전문성을 폄하하는 남성 고객도 있었지만, 여성 측량팀장은 처음 봤다고 정말 자랑스럽다며 열심히 하라는 응원으로 보람을 느낄 때도 많았다. 남자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마시지 못했던 술도 마시고, 팀원과 함께 식사하기 위하여 먹지 못했던 보신탕도 먹고, 산과 들 구분 없이 측량이 필요한 모든 곳을 다녀야 했던 나는 어느새 중성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남성적이고 힘이 드는 업무이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만큼 내 자신을 변화시키며 노력했으니 조금 사라진 여성성은 결코 안타깝지 않다.


여성의 부드러움이 남성의 강함을 능가한다


현장팀장으로 근무하며 나름대로 성과도 냈다. 정보경진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현장근무 직원에게 가장 영예로운, 측량업무 실적이 우수한 직원에게 수여하는 우수상도 받았다. 최초의 여성 팀장이란 수식어는 항상 내 이름처럼 따라 다녔다. 2008년, 14년 만에 공사 최초 여성 민원담당자로 다시 본사 발령을 받았다. 그간의 성과를 인정받아 차장으로 승진하였고, 2010년 현장으로 돌아가 여성 최초 현장의 차장이 되었다.


현장업무나 민원업무 등을 수행하는 데 있어 여성의 장점은 참 많다고 생각한다. 남자 직원에게 막무가내로 욕을 하던 민원인도 여성에게는 조심스러워하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질 때가 많다. 그렇게 현장에서 체득한 노하우는 내게 국민신문고 대상을 선물했으며 2013년 2월 대한지적공사 창사 36년 만에 최초 여성 지사장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밖에선 국민대표, 안에서는 살뜰한 엄마~! 일과 가정의 양립


나는 지금 오래전 현장 발령으로 눈물을 삼켰던 그곳에서 공사 최초 여성 지사장이 되었고, 아이들의 등하교를 함께하며 일과 가정을 동시에 지키는 자랑스러운 엄마로 살고 있다. 남초, 게다가 현장 중심의 조직에서 최초 여성 지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흥미를 주었다. 축하도 많이 받고 인터뷰도 많이 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성공적 여성 관리자의 사례로 선택되어 국민대표 30인 자격으로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했던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침식사로 밥과 국 준비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아무리 아파도 힘들어도 병가를 내 본 적이 없다. 사람 몸은 자기의 생활환경에 적응한다는 의지로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일과 가정의 양립 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어 요즘은 힘들었던 과거의 일들이 무용담이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후배들은‘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에 대해 거는 기대가 크다. 이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얘기들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처음처럼 꾸준히 내 길을 걷고자 한다. 본사에서 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했지만, 그때 현장으로 가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필연이라 믿으며 29년 전의 오○○의 모습 그대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어느 선배님의 말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말라.” 내가 속한 조직이 유리천장이라고 낙담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멋진 여성 관리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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